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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7714A582059700F.png 한국전쟁 초기 즉결처분 사례.txt


12연대 1대대장 신현홍 소령도 연산포로 일부 병력을 수습하여 탈출하였는데 연산포에는 많은 병력이 집결되어 있었으나 배가 없었다. 신 소령은 패잔 병력들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이 가운데 장교들이 있으면 나오라.”고 하였으나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계급장을 달고 있지 않았기에 상하를 구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민간인 어선 1척을 징발하여 왔는데 모두가 먼저 타려고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을 때 어떤 자가 장교임을 자칭하면서 우선적으로 타려고 하였다. 이 광경을 주시하고 있던 신 소령은 오합지졸들의 행동을 제지한 다음 그 장교라는 자를 불러내어 “이놈아! 장교 나오라고 할 때는 안 나오고 이제는 장교냐?”하면서 그 자리에서 권총으로 즉결처분하고 말았다.
p107 구판 한국전쟁사 2권

28일 오후 3시경 서울이 실함되었다는 비보를 들었다. 그래서 게릴라전이냐, 옥쇄냐, 후퇴하여 싸울 것인가 의론이 분분했는데 마침 미군기가 문산 방면을 폭격하는 모습을 보고 후퇴해서 다시 싸워야한다는 연대의 결정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연대 본부중대장 박구준 중위가 집합을 명령했더니 하사관 셋이 깔깔 웃으면서 “나라가 망했다는데 무슨 집합이냐?”하고 병사들의 집합을 방해했다. 그러자 박중위는 쫓아가기 무섭게 권총으로 세 명을 모두 사살해 버렸다. 그리고 “집합” 소리쳤더니 병사들이 즉각 집합하였다.
13연대장 김익렬 p108-109


서울이 함락된 뒤 도망쳐온 병사들이 행주나루를 통해 김포로 건너와 뿔뿔이 흩어지는데 공포심에 쫓겨 미친 듯이 달아나더군요. 장교가 막으면 쏘아 죽이고 달아나는 형편이었습니다. 조직이 완전히 붕괴된 광경이었습니다. 즉결처분권이 주어진 것이 이런 상황에서였지요.
국가운명이 존망에 달린 당시에는 별 말이 없었으나 전쟁 뒤 송요찬 장군 같은 사람이 즉결처분된 군인의 가족들로부터 고발을 당해 곤경에 처한 적도 있었습니다.
강문봉 장군 인터뷰 마당 1983년 9월호


(용인에서) 많은 사병들이 초췌한 몰골을 하고 고지 정상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고지 후방 지대에서는 헌병이 10미터 간격으로 서서 아군의 후퇴를 저지하고 있었다. “명령 없이 후퇴하면 총살이다. 진지를 사수하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아마 이것이 독전이구나.......”하고 진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병들은 독전의 기세에 눌려 다시 고지를 향하여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라 얼마 후 다시 많은 병력이 쏟아져 내려왔다. 마치 호수 제방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은 광경이었다. 이에 헌병 독전대는 계속 소리치면서 전선 복귀를 강요했다. 이때 사병 몇 명이 헌병 통제선을 넘어서자 헌병은 이들을 향해 발포했다. 순간 사병 3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 광경을 목격한 사병들은 그대로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히 헌병에게 사격을 가했다. 순간 헌병 5명이 쓰러졌다. 아군끼리의 불행한 살육전이었다. 헌병들은 하는 수 없이 통제선을 열어주었다. 이에 사병들은 남쪽을 향해 패주의 길에 올랐다. 비극의 순간이었다.
p29


우리 중대가 출동할 때마다 중대장 이석우 대위의 연락병 김하사는 나에게 외출 허가를 요청해 25일과 26일 2회까지는 허가했는데 청량리 출동에 앞서 또 외출을 요청하기에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8연대는 월북사건을 겪은 부대였기 때문이다. 왜 나가느냐 물었더니 중대장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하러 간다는 것이다. 그 편지를 뜯어보았더니 “일금 얼마를 누구에게 보내니 전해주시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 하사에게 “돈 받은 것 있느냐?” 물었더니 그런 것은 없다고 한다. 일금 얼마라는 것은 출동하는 대대의 병력수와 비슷한 숫자이기에 당시 8중대장 정승화 대위(훗날 육참총장)에게 그 편지를 보이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정 대위도 이상하다며 대대장 고백규 소령에게 같이 가서 보고를 하는데 연대장 서종철 중령이 출동하는 대대를 보기 위해 나왔다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석우 대위는 체포되고 신문한 결과 만주에서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것과 부대 이동 상황을 그때마다 간첩에게 알리었다는 사실을 자백하여 즉결처분으로 총살되었다. 
노병들의 증언


7월 17일 풍기 인근 전투에서 21연대 1대대장 윤태현 소령은 북괴군의 소수병력이 대대 관측소 부근까지 접근하자 이를 격퇴할 조치는 취하지 않고 조급하게 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때 그의 지휘하에 있던 4개 중대는 방어진지에서 분투하고 있었으나 그는 이를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1대대 장병들은 진내에서 목숨을 건 싸움에 투지를 불태우면서 간신히 북괴군의 제 1공격제대를 격퇴한 시점에서 철수명령을 전달받자 일시에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258고지가 북괴군 수중에 떨어지고 국군 8사단 중앙에 돌파구가 형성됨으로써 8사단은 방어선이 붕괴될 국면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단에서는 작전실패와 명령불복종의 책임을 물어 1대대장 윤태현 소령을 엄중문책(즉결처분)하고 연대 연락장교 조규영 소령을 후임 대대장으로 보임하였다.
p92-97   



극히 일부 부대에서 있었던 일이기는 하지만 당시 우리 국군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국군이 연전연패를 되풀이하자 절망 속에 빠져 후퇴하는 병사들에게 상관의 명령이 제대로 통할 리가 만무했다. 많은 장병들은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망각하고 제 한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빴다. 군법회의에 회부할 만큼 여유도 없는 상태에서 나온 것이 바로 즉결처분권이다.

서울을 적에게 내주고 후퇴하던 1950년 7월3일, 육군본부에서는 "부대의 후퇴는 군 최고지휘관인 육군참모총장이 명령할 뿐이고 예하 부대장은 후퇴를 명령할 권한이 없다"는 작전훈령(作戰訓令) 제2호를 선포한다. 하지만 그야말로 그런 훈령만으로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병사들을 돌려 전투에 투입시킬 수는 없었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장병들에게는 육군참모총장의 훈령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육본은 7월26일 0시부터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명령 없이 전장이탈을 하는 부하들에게 즉결처분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에게 부여한다. 전시에서의 즉결처분이란 곧 총살을 의미했다. 이후 즉결처분권은 군법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http://parizal.egloos.com/m/3417776



1542380257.jpg 한국전쟁 초기 즉결처분 사례.txt


이분은 이쪽으로 아주 유명하신분.. 이거 말고도 즉결처분 사례 존나게 많음


자세한건 그냥 나무위키 켜라 https://namu.wiki/w/%EB%B0%B1%EC%9D%B8%EC%97%BD#s-4.1

1542380256.jpg 한국전쟁 초기 즉결처분 사례.txt

육사생도끼리

fdsfsdfsdfdsfsd.JPG 한국전쟁 초기 즉결처분 사례.txt

즉결처형이 조작된 사례가 뒤늦게 밝혀져 보상받은 사례


1542380257 (3).jpg 한국전쟁 초기 즉결처분 사례.txt


일단 초기 혼란이 끝나고 훈령이 내려오고 난뒤엔 이런 행위는 거의 없어짐

Posted by 마스터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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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 생일축하 대참사.jpg 카톡 생일축하 대참사.jpg



ㅋㅋㅋ유병장수


Posted by 마스터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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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2376598.jpg jtbc 손절



얠먀냐 병쉰걑으면 먜걀삐씨가 숀졀하냐~~~

Posted by 마스터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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